[안재성의 金錢史] 돈 때문에 비잔틴 제국 침공한 4차 십자군

파산 위기에 몰린 4차 십자군, 사례금 노리고 비잔틴 제국 내전 개입
사례금 지불 거부되자 의뢰인도 공격…비잔틴 제국 멸망 후 라틴 제국 건립

십자군 원정은 `성전`을 내세우긴 했으나 결국 침략 전쟁이다. 그 중에서도 4차 십자군은 성지가 아닌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해 크리스트교 내부에서도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우리는 천민자본주의, 황금만능주의 등의 용어가 유행할 정도로 돈을 숭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정확히는 돈이라 불리는 종이쪽지를 숭배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돈’과 ‘경제’란 단어에 목을 매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한낱 종이쪽지에 지배당하고, 그 종이쪽지에 사회 전체가 얽매여 신음하는 세상에 살게 되었을까? 세계파이낸스는 [안재성의 金錢史] 시리즈를 통해 돈과 금융의 역사에 관해 짚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이 한 마디에 수만의 병사들이 서유럽을 떠나 멀고 먼 중근동으로 향했다. 서기 1095년부터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이후 수백 년간 유럽과 중동의 역사에 거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십자군 역사가 막을 내리기까지 서유럽에서 중근동으로 원정 간 십자군은 총 7차례였다. 이 중 가장 심한 악평을 듣는 십자군이 제4차 십자군이다.

십자군은 이교도에게 빼앗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성스러운 의무’를 내밀었으나 그 본질이 침략군임에는 틀림없다. 그들은 머나먼 타국, 아무런 교류도 원한도 없던 중근동의 이슬람교도들을 습격해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하고 땅을 빼앗았다.

이유는 단지 그들이 이교도란 것, 그리고 그들의 조상이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겨 예루살렘 등 팔레스타인을 정복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한 마디는 유럽인들의 죄책감을 희석시켜 주고 자신이 정의임을 주장하게 해준다. 하지만 4차 십자군은 자신들의 침략 전쟁을 ‘성전’으로 포장시켜주는 이 명분마저 흙발로 짓밟았다.

그들은 예루살렘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며 이슬람교도와도 싸우지 않았다. 반대로 같은 크리스트교도의 나라인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습격해 점령했다. 같은 신을 모시는 자들을 죽이고 약탈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니 유럽인이나 독실한 신도들조차 이들은 옹호하지 못하고 거세게 비난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4차 십자군은 팔레스타인이나 이집트가 아니라 비잔틴 제국을 침공한 걸까? 놀랍게도 이유는 단 하나, 돈 때문이었다.

◇파산 위기에 몰린 십자군 앞에 나타난 알렉시우스 황자

4차 십자군은 프랑스 귀족과 이탈리아 해상도시 베네치아의 합작으로 구성됐다. 타국의 귀족도 일부 참여하긴 했으나 소수일 뿐 대부분이 프랑스 귀족이었다.

서기 1198년 상파뉴 백작 티보,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블루아 백작 루이 등 프랑스의 젊고 유력한 귀족 70여명이 십자군 원정을 선서했다. 이들은 기병 4500명 등 총 3만5000명의 병력을 동원하기로 했다.

여기에 베네치아가 갤리선 50척과 전투원 5000명을 이끌고 참여했다. 베네치아는 또 기사와 병사들을 중근동까지 실어 나르는 수송 역할도 맡았다. 수송 업무 및 식량 등의 대금으로는 8만5000마르크가 책정됐다.

출발은 1202년 6월로, 목표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로 정해졌다. 예루살렘이 아닌 카이로를 목표로 삼은 것은 당시 예루살렘 등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는 나라가 맘루크 왕조의 이집트였기 때문이다. 적의 심장부를 쳐 예루살렘을 토해놓도록 하자는 전략이다.

그런데 하필 전군의 총사령관을 맡기로 한 상파뉴 백작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서 4차 십자군은 시작도 하기 전에 좌초 위기에 몰리고 만다. 다급하게 몽훼라토 후작 보니파초를 새로운 총사령관으로 추대했으나 그는 리더십과 십자군에 대한 열의 모두에서 상파뉴 백작에게 미치지 못했다.

리더십이 무너지자 병력 동원부터 문제가 생겼다. 약속한 날짜까지 베네치아에 도착한 병력은 당초 예정된 숫자의 3분의 1 수준인 1만여명에 불과했다.

더 큰 문제는 원정 자금이었다. 몽훼라토 후작은 상파뉴 백작만한 부자가 아닐뿐더러 그처럼 전 재산을 쾌척하지도 않았다. 다른 귀족들 역시 머뭇거리긴 마찬가지였다. 중근동까지 원정 갈 자금이 부족한 것은 물론 베네치아에게 지불할 대금조차 모자랐다.

프랑스 귀족들이 대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자 베네치아까지 비상이 걸렸다. 베네치아는 4차 십자군에 그야말로 거국적으로 참여했다. 상업국가인 베네치아가 정부의 명으로 1년간 모든 해외교역을 금지하고 상선을 전부 본국으로 모았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배까지 잔뜩 건조했다.

만약 프랑스 귀족들에게 대금을 받지 못하면 베네치아의 재정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결국 자금 부족 때문에 4차 십자군은 그 해 동쪽으로 출진하지도 못했다. 함대는 자라에 머무른 채 1202년 겨울을 나게 된다.

4차 십자군은 출범도 못해본 채 파산 위기에 몰린 것이다. 고민에 싸인 수뇌부에게 비잔틴 제국의 황자 알렉시우스가 접근했다.

대부분의 전제군주국이 그러하듯 비잔틴 제국도 궁정 내의 권력 다툼이 매우 심했다. 특히 알렉시우스 3세는 권력에 눈이 멀어 형의 제위를 강탈한 뒤 형의 두 눈을 도려내고 감옥에 가뒀다.

그 과정에서 실수로 형의 아들, 자신과 이름이 같은 조카가 수도를 빠져나와 도망치는 것을 허용했다. 그 알렉시우스 황자가 십자군을 찾아와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해 무도한 삼촌을 몰아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황금의 유혹에 굴복한 십자군…돈 때문에 의뢰인까지 습격

말도 안 되는 부탁이라며 거절하려던 십자군 수뇌부는 알렉시우스가 내건 조건에 마음이 흔들렸다. 알렉시우스는 자기가 비잔틴 제국 황위에 오르도록 와줄 경우 △ 20만 마르크 지급 △ 이집트 공략을 위해 병력 1만 명 제공 △동서 교회 통합 등을 약속했다.

특히 총사령관을 맡고 있는 몽훼라토 후작은 적극 찬성에 나섰으며 고민하는 다른 귀족들까지 열성적으로 설득했다. 때문에 후일 몽훼라토 후작과 알렉시우스가 처음부터 짜고 친 연극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결국 20만 마르크와 병력 제공이라는 미끼에 넘어간 십자군은 다음해 카이로가 아닌 콘스탄티노플로 향한다. 당시 로마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처음에는 노발대발했지만 ‘동서 교회 통합’繭?말을 듣자 입을 다물었다.

동방의 그리스 정교회를 서방의 카톨릭 교회 아래 무릎 꿇리고 두 교회를 카톨릭으로 통합한다. 그것이 성공하면 인노켄티우스 3세의 명성은 불멸의 수준이 된다. 교황은 그 달콤한 미끼를 뱉어내지 못했다.

1203년 6월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 앞에 도착했다. 콘스탄티노플은 3중 성벽으로 방비돼 난공불락으로 유명했다. 8세기에 습격한 아랍 군대도 이 도시를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바다 쪽, 특히 금각만에 위치한 성벽은 낮고 허술했다. 배 위에서 성벽을 공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때문이다. 십자군은 이 부분을 노렸다. 베네치아 해군이 금각만의 제해권을 장악한 뒤 배의 돛대에 ‘움직이는 다리’를 달아 이를 통해 성벽으로 돌진했다.

이 전략은 멋지게 들어맞았다. 당시 비잔틴 제국은 국방을 주로 용병에 의존했는데 그들은 충성심이 약하다. 프랑스 장병과 베네치아 해병들이 용감하게 돌격하자 수적으로 훨씬 유리함에도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금각만 쪽의 성문이 뚫리자 알렉시우스 3세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는 재물만 챙겨서 소아시아로 달아나 버렸다. 황자 알렉시우스가 새로운 황제 알렉시우스 4세로 등극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십자군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였으나 그들은 거기서 그치지도 않았다. 알렉시우스 4세가 돈이 부족하다며 사례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자 십자군은 격분했다.

20만 마르크라는 거액은 실제로 쉽게 마련할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그러나 돈 때문에 같은 크리스트교도의 나라까지 친 십자군 수뇌부들에게 그런 이야기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알렉시우스 4세와 십자군의 사이는 점점 벌어졌다. 1204년 1월 불타오르는 배 몇 척이 베네치아 함대 쪽으로 흘러들어온 사건이 결정타를 가했다.

알렉시우스 4세의 행위라고 확신한 십자군은 전쟁을 결심했다. 그 해 4월 십자군은 마침내 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의뢰인까지 공격했다. 갓 제위에 올라 세력이 부족한 알렉시우스 4세는 얼마 버티지 못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선제의 사위인 무르추플루스가 알렉시우스 4세를 암살하고 황제를 자칭했다. 하지만 그도 오래 가지 못했다. 십자군이 또 다시 금각만 쪽 성벽을 장악하자 겁에 질린 무르추플루스는 가족들과 함께 장인이 있는 소아시아로 도망쳤다.

콘스탄티노플은 십자군에 의해 점령됐다. 비잔틴 제국은 멸망했다. 수많은 이민족의 습격, 사산 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이슬람교도의 공격 등을 버텨낸 제국이 같은 크리스트교도, 그것도 ‘성전’을 내세운 십자군에 의해 쓰러진 것이다.

몽훼라토 후작은 장병들에게 사흘간의 약탈을 허락했다. 학살과 약탈의 광풍이 도시를 뒤덮었다. 나흘째 되는 날 약탈품을 모아보니 3개의 교회가 가득 찰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콘스탄티노플은 오랫동안 비잔틴 제국의 수도이자 유럽 최고의 대도시였다. 이 광풍 속에서 무수한 문화재와 유물이 파괴됐다.

십자군 수뇌부들은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라틴 제국의 건립을 선포하고 플랑드르 백작을 초대 황제로 추대했다. 이어 제국의 영토를 자기들 마음대로 나눠 가졌다.

다만 라틴 제국은 명분 없이 세워진 나라라 그 기반이 매우 약했다. 약 50년 후인 1261년 비잔틴 제국의 잔존 황족 중 한 명인 팔라이올로구스가 베네치아의 라이벌 제노바와 손잡고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했다.

덕분에 비잔틴 제국 재건됐지만 제국은 더 이상 과거의 성세를 되찾지 못했다. 점점 약소국으로 쪼그라들더니 결국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했다.

여러 차례 전술했듯이 돈에 대한 탐욕은 신앙심이나 동포애를 월등히 뛰어넘는 경우가 허다하다.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침략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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