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의 金錢史]지폐는 가짜 돈이다?

상품통화 기능이 거세된 절름발이 통화…근원적 불안정성 내포
얼굴 화장과 유사…지폐가 만들어내는 '거품과 풍요' 양면성

 

우리는 천민자본주의, 황금만능주의 등의 용어가 유행할 정도로 돈을 숭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정확히는 돈이라 불리는 종이쪽지를 숭배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또한 ‘돈’과 ‘경제’란 단어에 목을 매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한낱 종이쪽지에 지배당하고, 그 종이쪽지에 사회 전체가 얽매여 신음하는 세상에 살게 되었을까?
세계파이낸스는  [안재성의 金錢史] 시리즈를 통해 돈과 금융의 역사에 관해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돈을 바닥에서 긁어모을 수는 없으나, 지혜는 아주 깊이 묻혀 있는 재보도 파낼 수 있습니다. 재능 있는 사람의 본성과 정신의 힘은 이를 능히 캐낼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릴 힘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십니까? 모든 원소가 폐하의 존엄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합니다. 앞으로 이 종이 한 장은 1000크로네에 해당한다는 포고령을 내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명작 <파우스트>에 나오는 내용으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국가 재정이 거덜나 고민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악마의 꾀’를 불어넣는 장면이다.

황제는 처음에는 “터무니없는 사기극”이라며 거부한다. 그러나 재정을 재건할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자 결국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무릎을 꿇고 만다.

지폐가 발행돼 제국에 뿌려지자 처음에는 재정이 단숨에 호전되는 듯 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곧 감당하기 힘든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제국의 경제는 더 심각하게 망가지고 만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황제가 “지폐는 사기극”이라며 분노한 장면이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히 돈이라고 여기며 생활하는 1만원짜리나 5만원짜리 지폐, 이를 ‘돈’이라 칭하는 것 자체가 사기란 것이다.

실제로 먼 과거로 가서 지폐를 내밀면서 “이건 돈이다”라고 말하면 즉시 ‘사기꾼’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지폐가 꽤 많이 유통되고 상용화된 200년 전의 유럽에서도 지폐로 물건값을 지불하려 하면, 상인들은 “지폐는 ‘진짜 돈’이 아니므로 액면가 전부를 인정해줄 수 없다”고 답할 것이다. 여기서 ‘진짜 돈’이란 물론 금화를 뜻한다.

◇‘절름발이 통화’ 지폐

단지 이들이 옛날 사람이라서, 지폐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지폐는 ‘돈’에 꼭 필요한 기능이 심각하게 결여돼 있다.

우리는 세종대왕이 그려진 1만원짜리 지폐로 1만원에 해당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지폐를 갈기갈기 찢으면 어떻게 될까? 물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가 될 것이다. 이것이 지폐가 ‘가짜 돈’이라는 첫번째 증거다. 

돈은 크게 가치통화와 상품통화의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우선 가치통화로서 다른 상품의 가치를 재는 기능을 한다. 자동차, 휴대폰 등 여러 상품에 돈을 기준으로 가격을 매겨서 우리는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

또한 상품통화로서 돈이 그 자체로 내재된,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다. 일단 돈이, 그 화폐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보유했는지 명확해야 그걸 기준으로 다른 상품의 가치를 잴 것 아닌가.

예를 들면, 수호지에 나오는 인물들이 은그릇, 은잔 등을 발로 밟아 찌그러뜨려서 부피를 줄인 후 들고 도망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당시 송나라에서는 은이 주된 통화로 활용됐는데, 은덩어리가 멀쩡하든 일그러지든 무게만 같으면 동일한 가치로 인정됐기 때문에 그런 장면이 서술된 것이다.

‘진짜 돈’, 즉 금과 은은 쪼개도 부셔도 녹여도 그 가치가 거의 훼손되지 않는다. 금화 및 은화의 가치는 표면에 새겨진 숫자가 아니라 그 속에 포함된 금과 은의 함유량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지폐는 찢으면 그냥 쓰레기다. 여기에 무슨 내재된 가치가 있겠는가? 따라서 지폐는 상품통화로서의 기능이 거세된, ‘절름발이 통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원화는 대한민국 정부가 쓰러지면 그냥 휴짓조각이 된다. 세계적으로 가장 널?통용되는 달러화도 미국 정부가 망하면 역시 휴짓조각일 뿐이다.

역사의 긴 호흡으로 살펴볼 때 국가의 흥망은 흔히 있는 일이다. 국가가 망한다고 해서 즉시 가치가 제로로 변하는 돈은 이미 돈이라고 인정하기 힘들다. 이것이 지폐가 ‘가짜 돈’이라는 두번째 증거다.

반면 금은 상품통화로서 내재된 가치가 있기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설령 미국이 멸망해도 통화로서 기능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은 모두 만약을 대비해 일정량의 금을 보유하는 것이다. 한국은행도 47억9000만달러어치(1월말 기준)의 금을 보관하고 있다.

◇지폐가 내포하는 근원적 불안정성…거품 유발

이처럼 지폐는 상품통화로서의 기능이 결여된, 근원적인 불완정성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가장 흔한 문제로는 물가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정확히는 매년 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 지폐 자체에 정해진 가치가 없기에 지폐를 기준으로 책정되는 재화나 서비스의 가치가 계속 변하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현관 로비에 ‘물가안정’이라고 쓰인 커다란 간판을 걸어두고 있다. 한국은행이 ‘물가안정’을 최우선적인 정책 목표로 잡고 있다는 것은 거꾸로 말해 물가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뜻이다.

첨언하자면, 매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이런 현상은 인류 역사에서 극히 최근의 일이다. 내재된 가치를 지닌 금을 통화로 쓸 때는 인플레이션이 별로 없었다. 과거에는 약탈 전쟁 등의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을 경우 100년 동안 인플레이션이 거의 없는 사례도 흔했다.

물가가 불안정하니 거품도 자주 생긴다. 일본의 ‘거품 경기’, 한국의 ‘부동산 거품’, ‘글로벌 금융위기’ 등의 원인 중 하나는 지폐의 불안정성이었다.

이렇게 문제점이 많은 지폐를 왜 쓰는 걸까? 정치가들이 바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정치가들은 꽤 똑똑하다. 주변에 유능한 참모도 수두룩하다. 정부의 정책이 엉망진창인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정치가들이 나라 전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 ‘정책’이라는 수단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폐는 단점도 많지만, 장점도 매우 많다. 우선 편리하다. 수백kg, 수톤의 금을 싣고 다니는 것보다 몇 장의 지폐를 들고 다니는 게 훨씬 편하다. 그래서 지폐를 사용하면서부터 상업이 크게 발달했다.

또 지폐는 거품을 자주 일으키지만, 거품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거품은 곧 풍요와 연결된다.

이는 여성의 화장과 비슷하다. 적절한 화장은 여성을 더 예뻐 보이게 만든다. 다만 과도한 화장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을 느끼게까지 한다. 그렇다고 해서 화장을 다 걷어버리면 그것 역시 별로 상쾌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적절한 밸런스가 잡힌 거품은 인류를 더 풍요롭게 한다. 일본은 ‘거품 경기’ 시절에 경제의 최전성기를 누렸다. 우리나라도 2000년대 초중반 ‘부동산 거품’이 한창일 때 사회 전체에 돈이 넘쳐흘렀다. ‘웰빙 문화’나 ‘해외여행을 자주 떠나는 문화’는 모두 그 때부터 시작됐다.

‘거품과 풍요의 역사’를 상징하는 지폐. 다음 편부터는 지폐라 불리는 종이쪽지에 지배당하는 세상, 풍요로우면서도 돈에 얽매이는 세상이 형성된 과정을 역사적인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짚어본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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